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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사천군 곤명면 용산리 와룡산(臥龍山) 동남쪽 기슭에 있는 사찰.
 


대한 불교 조계종 제 13교구 쌍계사(雙溪寺)의 말사.
 

 

다솔사풍경

- 511년 (지증왕 12)에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하여 영악사(靈嶽寺)라 하였고, 636년(선덕여왕5)건물 2동을 신축하고 다솔사로 개칭하였다. 676(문무왕 16)년에 의상대사가 다시 영봉사(靈鳳寺)라고 고쳐 부른 뒤 신라 말기에 국사 도선(道詵)이 중건하고 다솔사라고 하였다. 그뒤 1326년 (충숙왕 13년) 나옹(懶翁)이 중수 하였고 조선 초기에 영일ㆍ효익 등이 중수하였으며,임진 왜란의 병화로 소실되어 폐허가 되었던 것을 숙종 때 복원 하였다.현재의 건물은 1914년의 화재로 소실된 것을 이듬해 재건한 것이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된 대양루(大陽樓)를 비롯하여 대웅전ㆍ나한전(羅漢殿)ㆍ천황전(天王殿) 요사채등 10여 동의 건물이 있다. 대양루는 1749년(영조 25)에 건립되어 현재까지 그대로 보존되어있는 2층 맞배집으로서 건평 106평의 큰 건물이다.
 
또한 1978년 2월 8일에 있었던 대웅전 삼존불상 개금불사(改金佛事)때에 후불 탱화 속에서 108개의 사리가 발견됨에 따라, 이 절에서는 익산 미륵사지석탑을 본뜬 높이 23m, 30평 정도의 성보법당(聖寶法堂)을 탑 안에 설치하여 동양최대 규모의 적멸보궁사리탑(寂滅寶宮舍利塔)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한편 이 절은 일제때 한용운(韓龍雲)이 머물러 수도하던 곳이며, 소설가 김동리(金東里)가 <등신불(等身佛)>을 쓴 곳이기도 하다. 이밖에도 절 주위에서 재배되는 죽로차(竹露茶)는 반야로(般若露)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명차이다.

만해와 효당, 그리고 다솔사


만해 한용운은 20세기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승려이다. 그러나 만해의 행적과 그가 지향한 이상은 승려에서 머물 수 없다. 그는 독립운동가로, 시인으로, 소설가로, 불교개혁론자로, 저술가로, 사상가로 다양한 족적을 우리에게 남겼던 것이다. 그의 행적과 사상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의 영향은 그가 생존한 당시에도 그러하였지만, 사후에도 지속되고 있다. 때문에 만해는 한국인의 정신적인 고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에 본고에서는 만해와 일제하의 불교청년운동과 항일민족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효당 최범술과의 인연의 실타래를 소묘하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만해가 정신사의 큰 나무였음을 재확인하고, 나아가서는 만해에게 영향받은 일군의 인물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실마리를 찾게 될 것이다.

만해와 효당이 직접적으로 만나고, 효당이 만해에게 일정한 영향을 받게 된 것은 아마도 1930년대 초반 불교청년운동의 구도일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만해가 당수로 추대된 만당의 등장과 연계된다고 보겠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효당 최범술은 승려로 출가하였으며, 거족적인 3·1운동의 일선에서 참여하였다. 이에 효당이 만해를 만나기 이전의 행적을 정리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효당 최범술은 1904년 경남 사천군 서표면에서 출생하였다. 4남3녀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1910년 고향의 사립학교인 개진학교를 입학하였지만, 재학중 일본인 교사 배척과 동맹휴학 사건으로 퇴학당하고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그 이후 곤양공립보통학교에 편입하여 졸업을 하였다. 졸업 이후, 효당은 당숙이 운영하는 서당에서 사서를 배우다가, 부친과 함께 선대 조상을 위한 행사에 참가하기 위하여 다솔사를 방문하였다. 당시 효당은 다솔사의 스님이 읽는 경전소리를 듣고 출가의 발심을 갖게 되었다.

1917년 그의 나이 14세에 부모의 승낙을 받아 다솔사로 입산, 출가하였다. 입산 후에는 염불을 배우다 곧 해인사의 지방학림에 입학하였다. 해인사에서는 임환경 스님을 은사로 수계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서울에서 내려온 독립선언서 등사 책임자로 활약하였다. 이에 그는 대구까지 가서 미농지 1만여 장을 구입하여 3000여 매의 선언서를 등사하고 대구, 경주, 양산 등지로 그를 배포하였다. 당시 효당은 합천읍내의 장날을 이용하여 일제의 우체국, 면사무소를 습격하고 전화선을 절단하였다. 나아가서 그는 다솔사에도 와서 지역 유지들에게 선언서를 나누어주었으며, 고향의 친구들에게도 선언서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곤양헌병분견대에 끌려가 야만스러운 폭행을 당하였다. 효당은 이후 진주검사국으로 끌려갔으나, 만 15세가 되지 않아 석방되었다.

이후 효당은 해인사 지방학림을 졸업하고 다솔사로 돌아왔다. 그러나 효당은 학업을 지속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때는 1922년 6월이었다. 일본에 건너간 그는 학비를 벌기 위해 신문배달원, 엿장수 등 갖은 고생을 다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정부주의 독립운동가인 박열을 만나 독립운동을 하였다. 그 과정에서 효당은 일제에게 피체되어 8개월을 구속당하였다. 그 이후에는 학업에 전념하였는데, 1923년 4월 일련종 입정중학교에 편입학, 1926년 물리학교 입학, 1927년 대정대학 예과에 입학한 사실이 그를 말해준다.

효당은 학업을 하면서 재일불교청년운동에 가담하였다. 1927년 4월 재일조선불교청년회에 가담하여 간부로 활동하였다. 학업중인 1928년에는 다솔사 주지로 피선되기도 하였다. 그는 재학중 동경 유학생들을 결속하여 불교와 일반 철학을 연구하는 연구회인 삼장학회를 조직하였다. 한편 1929년 봄에는 대정대학 불교과에 정식 입학하였다. 그리고 불교청년운동의 재조직의 일환으로 1931년 3월에 등장한 조선불교청년동맹 동경동맹의 집행위원으로 활약하였다.

이상과 같은 내용이 효당이 만해를 만나기 이전의 행적이다. 효당이 만해를 만난 시점은 기록상으로는 정확치 않다. 물론 효당은 만해를 해인사 지방학림에 입학 당시부터 풍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그가 일선에서 참여한 3·1독립선언서 등사 및 배포의 인연을 만든 당사자가 만해가 아니었던가. 효당이 만해를 만난 계기는 불교계 항일 비밀결사체였던 만당(卍黨)이었다. 만당은 불교청년운동의 지하 단체였지만 불교의 자주화를 기하면서 식민지 불교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목적으로 1930년 5월경 결성되었다.

즉 만당은 1928년 3월에 재기한 조선불교청년회의 활동을 더욱 활성화시키려는 의도와 침체일로에 있었던 당시 불교 교단을 쇄신하겠다는 열정이 어우러져 가시화된 것이었다. 만당이 등장하기 이전 불교청년운동은 동지연결의 부재, 통일정신 박약 등 그 자체내의 문제점이 적지 않았다. 바로 이 모순을 타개하기 위한 강력한 결사체가 바로 만당이었다. 당시 만해는 만당의 영수로 추대되었다. 만당의 이념은 강령인 정교분립, 교정확립, 불교대중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현전하는 여러 기록을 분석하면 만당의 결성이 1930년 5월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만당을 결성시킨 주체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견이 없지 않다. 이에 관련해 대흥사 출신 승려로 3·1운동 당시 서울시내에서 선언서를 배포하였으며, 3·1운동 이후에는 만주로 건너가 군관학교에 입학하였던 박영희 스님의 증언이 있다. 박영희는 이후 1928년 중앙불전에 입학하여 향학을 불태우기도 하였다.

그는 《불교신문》 1989년 3·1절 70주년 대담기사, 「조선민중은 노예의 삶을 거부했다」에서 아마 내가 중전 3학년 때라고 생각하는데 어느날 만해스님이 학교로 나를 찾아오셨어. 그리고 비밀 결사를 조직할 것을 지시했지. 그래서 옛날 함께 운동을 했던 최범술, 이용조, 강재호, 박근섭을 만나 탑골 근처에서 막걸리 한잔씩 마시고 結社不變의 맹세를 했지. 그 뒤 점차 동지를 규합했는데 30∼40명을 확보했지.

라 하였다. 요컨대 박영희가 만해의 지시를 받아 만당을 결성한 주도자의 한 사람이 효당이라는 것이다. 박영희는 《법륜》지 174호(1973. 8)의 「광복절에 생각한다」의 특별대담인 김어수(당시 중앙포교원 법사)와의 대화에서도 그의 입장을 동일하게 개진하였다.

그러나 만당의 증언을 남긴 이용조는 《대한불교》 1964년 8월 30일자 기고 글인, 「내가 아는 卍字黨 事件」에서 조학유, 김법린, 이용조, 김상호가 만당 결성의 주역이라고 회고하였다. 이용조는 2차 당원으로 박영희를 포함한 다수의 불교청년과 중앙불전 재학생을 지목하면서도 효당에 대해서는 언급치 않았다. 다만 동경에도 만당의 지부가 조직되었는데, 그 책임자는 김법린이었으며 당원의 일원에 효당이 포함되었다고 하였다. 한편 만해를 지근거리에서 만난 선암사 출신 승려였던 조종현은 만당을 최범술을 포함한 불교청년 19인이 조직한 비밀결사로 일제에 항거하며 투쟁하였다고 회고하였다.

그런데 정작 효당 자신이 정리한 인생회고록, 「청춘은 아름다워라」(《국제신문》, 1975년 연재물)에는 만당과 관련하여 자신의 국내에서의 참여 및 역할에 관한 내용은 전혀 남기지 않았다. 효당이 만당의 결성 초창기부터 관련되었는가는 더욱 세밀히 따져 보아야 한다. 다만 그가 일본에 유학을 갔지만 방학 기간에는 귀국하여 다솔사 주지역할을 하면서 서울에 상경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때문에 그 상경시에 박영희와 접촉하였을 개연성은 충분하다고 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효당은 만당의 당원이었다는 점이다.

효당은 1933년 2월 일본 대정대학 불교학과를 졸업하였다. 졸업 직후에는 국내 불교청년운동의 총집결체인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의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즉 그는 졸업과 동시에 청년운동의 맹장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은 이전 조선불교청년회의 부진을 극복하기 위해 새롭게 등장한 불교청년운동의 총집결체였다. 이 총동맹에는 신식학문을 공부하고 있는 불교청년들뿐만 아니라 조선불교여자청년회를 비롯하여 강원에서 공부하고 있던 학인들도 가담하였다. 비구니 스님으로 유명한 김일엽, 김법린의 부인 박덕순, 시조시인으로 유명한 조종현 등이 바로 그 당시에 새롭게 가담하여 운동을 하였던 멤버들이었다.

총동맹이 발족하였던 1931년 3월에는 김상호가 중앙집행위원장이었으며, 1932년에는 허영호가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그런데 허영호가 위원장을 맡을 무렵 청년운동 내부에는 운동 노선을 둘러싸고 이견과 갈등이 내재하였다. 그리하여 그 대립은 청년운동, 만당 등의 진로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엿보이고 있었다. 바로 이 같은 시기에 효당이 불교청년운동의 책임자로 피선된 것이다. 이는 효당의 민족정신, 불굴의 운동정신 등에 대한 신뢰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한다.

이에 효당은 국내 불교청년운동계의 부름을 받고 귀국하였다. 그는 다솔사 주지를 역임하면서 불교청년운동의 재정비라는 당면 과제를 해결해야만 되었다. 그러나 효당이 귀국하여 보니 불교청년운동계나 중앙교단의 상황이 매우 악화되어 있었다. 만당의 내분이 청년운동 노선뿐만 아니라 종단의 노선까지 불똥이 튀었던 지경이었다. 그 요인은 만당 당원인 허영호와 정상진 간에 전개된 교무원 출자자본 40만원을 둘러싸고 전개된 상이한 현실인식이었는데, 그 대립은 급기야 불교계 내의 본산간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또한 만당의 당원인 김상호가 만당 내부 약속인 중앙교단 간부에 진출치 말자는 것을 어기고 교무원 이사에 취임한 것도 그 내분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또한 만당의 당원이면서 불교청년운동의 이론가인 이용조는 그 같은 실정에 환멸을 느끼고 만주로 떠나기도 하였다. 이 구도하에서 당시 유일한 잡지인 《불교》사도 문을 닫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년운동의 책임자로 등장한 효당은 그러한 갈등의 구도에서 배척을 받고 있는 불교청년들을 보호하면서, 일면으로는 만해를 후원하고 있었다. 효당 그가 이러한 생각을 갖게 된 것은 만해 한용운이 문제 해결에 최선을 다하라는 은근한 ‘권고’에서 나온 것이었다. 효당은 그 정황을 자신의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그리하여 중앙에서 실직한 김법린 전가족, 허영호, 한보순과 불교계와는 딴판이지만은 김범부 선생과 그 전가족(범부선생은 물론 동생 김동리씨도) 등의 생활을 다솔사로 데려와 내가 맡았고 만해선생의 생활상의 책임도 져야했다. 어쨌든 다솔사는 배일 항일의 근거지가 되었다.

당시 효당은 김법린, 허영호, 김범부, 김동리 등의 생활뿐만 아니라 만해 한용운의 생활까지 부담하였던 것이다. 이에 다솔사는 이러한 민족진영 인사들의 후원처가 되었다. 효당은 그러한 역할에 대하여 일제와 투쟁을 하기 위한 환경의 조성으로 보고, 자신이 굴복하면 민족 진용은 완전히 무너질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 즈음의 효당은 다솔사가 배일과 항일의 근거지였다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런 사정과 관련하여 조종현이 만당은 그 후반기에 다솔사가 근거지였다고 증언하였음도 유의할 내용이다.

한편 효당은 귀국 후 불교청년운동을 재정비하였다. 우선 효당은 불교청년운동의 비밀결사체인 만당의 해산을 결정하였다. 이는 만당이 존속하면서 내분이 일어나는 것은 곧 일제에게 발각되고 수많은 희생이 따를 것을 대비한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효당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심정을 회고하였다.

나는 이해 4월 중순 어느날 불교청년회관 근처의 동해루라는 곳에서 만당의 당원들을 불러모았다. 이 자리에서 만당의 해체를 제의했다. 도꾜에서 不逞社를 통해 투쟁한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이 같은 비밀결사가 이로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 같은 비밀결사는 자칫 잘못하면 총독부 당국에 역이용 당하여 동지간에 불화가 생길 우려가 있었다.

이러한 효당의 제의에 일부 당원은 아쉬움을 표하였고, 일부 당원은 동의를 하였으나 결론은 효당의 의견대로 집행되었다. 이 날의 비통한 심정은 재일불교청년들의 기관지인 《금강저》 21호(1933.12)의 「18인 인상기」에 잘 나온다. 효당은 만당의 해산 이후 불교청년총동맹의 간부를 개선하면서 청년운동의 체제 정비를 단행하였다.

그 후 효당은 지금의 명성여중고의 전신인 명성여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이 학교는 당시 불교계가 경영하는 최초의 여자학교였다. 그리고 1934년부터는 다솔사에 초등과정의 광명학원을 세워 그 인근의 농민자제들을 교육시키고 있었다. 그 학원의 강사는 김동리가 주로 담당하였다. 김동리는 다솔사에서의 경험을 그의 문학작품에 반영시킬 수 있는 영양분을 얻었던 것이다. 김동리의 대표적인 소설인 등신불은 바로 이곳에서 탄생하였다. 한편 효당 그는 다솔사에 불교전수강원을 열고 있었다. 이 강원의 강사는 자신을 비롯하여 김법린, 강고봉, 김정설 등이 맡았다.

이처럼 다솔사는 효당의 주도하에 새로운 기풍이 일고 있었다. 이에 일제 당국은 다솔사를 항일 모의하는 곳이 아닌가 하며 감시를 기울이고 있었다. 더욱이 다솔사에는 김법린, 김범부 등 당시로서는 기라성 같은 지식인이자 우국지사들이 거주하며 공부를 하였으니 말이다. 만해 한용운도 그러한 인물의 중심이었음은 물론이었다. 그리고 다솔사의 이러한 정황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다솔사는 국내의 유지 즉 민족운동에 뜻을 갖고 있는 인물들이 드나들게 되었다. 심지어는 운동의 방략으로 사회주의 노선을 채택한 부류들의 왕래도 있었다. 효당은 이러한 정황을 재정비된 만당으로 여길 정도였다. 요컨대 항일의 근거처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당시 다솔사에는 효당의 방 앞에 자그마한 금잔디밭이 있었다. 그래서 다솔사에 머무는 인사들은 그 잔디밭에 머물며 다양한 토론을 하였다고 한다. 간혹 일본 경찰이 오면 햇빛을 쬐는 모습이 되었다.

그러나 호사다마인지, 1938년 8월 최범술, 박근섭, 장도환, 김법린 등이 진주서에 검거되는 것을 시작으로 박영희, 김범부, 노기용, 최윤동, 김수정 등이 계속하여 피체되었다. 이런 정황을 지금까지는 만당의 검거 선풍으로 말하고 있다. 만당의 발각으로 인해 당원의 검속은 6차례나 지속되었다. 그러나 그 경과와 내용은 정확치 않다.

다만 이용조의 회고에는 만당이 발각되어 김법린, 장도환, 최범술(효당), 박근섭 등 20여 명이 피검되었다고 전하였다. 그리고 피검된 인물들이 만당의 당수로 작고한 조학유를 내세웠고 만당에 관한 문서가 전연 없었기에 만해에게 화가 미치지 않았다. 만당이 결성될 적에 이용조는 만당의 당수로 만해를 마음속으로만 모시고 자주 왕래하면서 자문만 받자고 주장하였다. 만해에게는 당수라는 것을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만해를 당수로 정식으로 내세우면 언제인가 조직이 탄로날 경우 그 화가 만해에게 미칠 것을 차단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이용조는 만당이 발각되었지만 만해에게 피해가 안 간 것을 불행 중 다행으로 여기었다. 당시 만해는 그를 따르던 만당 당원들이 일제에 피체되자, 각지의 구속처를 돌아다니며 면회를 시도하였으나 일제는 그를 냉정하게 거절하였다. 그런데 이 사건으로 효당은 일제에 피체되었지만, 정작 자신의 회고록에는 그를 소략하게 정리하였다. 그러나 조종현은 이에 대하여 당원 최범술은 세 차례의 옥고를 겪었다고 증언하였다.

그리고 효당은 1939년 여름 다솔사 강당에서 일본의 승려 40여 명을 초청하여 법회를 열었다. 순수한 불교와 학문에 대한 강론을 위주한 법회였는데, 그 법회에는 한국불교의 스님들도 참석하였다. 그 법회를 ‘己卯多率寺安居’라고 효당은 불렀다. 그 법회가 개최된 다음 달, 다솔사에서는 만해 한용운의 회갑을 기념하는 잔치가 열렸다. 그 때 만해는 회갑 기념으로 다솔사 경내에 향나무를 기념식수로 심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 향나무는 잘 자라고 있을 터이지만.

이처럼 효당은 그 암울한 일제치하에서 만해와의 돈독하고 특별한 인연을 키워가고 있었다. 그러나 만해는 8·15해방이라는 조국의 광복을 미처 보지 못하고 1944년 6월 29일 입적하였다. 입적 직후 효당은 만해가 머무르던 심우장을 찾아가서 만해의 서가를 정리하였다. 이 인연은 만해의 유품을 효당이 보관할 수 있는 계기를 준 것으로 보인다. 당시 서가를 정리하였던 효당은 만해의 ‘자서로서 기초된 참으로 허무러진 문건’ 즉 독립선언서를 토대로 하고 봉은사 승려인 홍태욱이 보관한 인쇄된 선언서와 대조하여 해방된 직후에 발간된 불교잡지인 《신생》 창간호(1946.3)에 「기미운동과 독립선언서」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하였다.

효당은 해방공간의 불교교단에서 총무부장을 역임하였는데, 《신생》 3집(1946.8)에도 「고 만해선생 大朞를 당하여」라는 글을 기고하였다. 만해의 해방 이후 첫 제사인 大朞(서거 1년 후의 제사)에 즈음하여 당시 교단간부들은 만해의 산소를 참배하였다. 그 참배의 동참자는 효당 최범술을 비롯하여 박윤진, 장도환, 허영호, 박영희, 김잉석, 오택언, 유성갑, 박달준, 유영숙, 정일택 등 총무원, 신생사, 불교청년당의 간부, 유족, 문도, 지인 들이었다. 그중 장도환은 《신생》 3집에 「만해선생 산소 참배기」를 기고하였다.

그리고 이용조는 1948년 1월호의 《불교》지에 「만해대선사 묘소를 참배하고」를 기고하였다. 그 내용에는 1947년 10월 15일의 만해 묘소 참배의 사정이 전하고 있다. 당시 그 참배에는 김법린 총무원장을 위시하여 박영희, 오택언, 이용조, 정종갑, 정진섭 등이 참여하였다. 이처럼 해방공간 교단 중심 인물들은 만해의 생애와 사상을 기리고 있었는데 이는 효당이 교단 중심부에 있었음과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

만해가 입적하자 그의 유품과 소장 자료는 친구였던 화가 박광이 보관하였다. 박광은 만해의 자료를 갖고 유고 간행을 서둘렀으나 당시 어수선한 사회의 실정으로 그 성과를 기하지 못하였다. 1948년에 가서야 한용운전집 간행위원회가 결성되었다. 당시 그 위원회에 가담한 인물은 박광, 박영희, 최범술, 김법린, 박근섭, 김적음, 허영호, 장도환, 김관호, 김용담 등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의 성과가 빛을 보기 이전에 6·25가 발발하여 그 자료는 대구로 내려왔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가야 하는 비운을 맞으면서 제대로 보관되기는 어려웠지 않았나 한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전집이 간행될 정도의 사회 전반적인 안정은 어려워, 전집은 한동안 간행되지 못하였다.

자료를 보관하였던 박광은 1957년에 가서는 만해와 인연이 남다른 효당에게 인계되었다. 효당에게 전집 간행을 부탁하였음은 물론이었다. 한편 1958년 고려대 내의 고대문학회에서도 만해전집 간행을 시작하였다. 이에 고려대 작업팀(조지훈, 임종국, 박노준, 인권한 등)은 효당과 접촉하여 전집간행을 착수하였다. 그 결과 상호 합의하에 1958년 7월 경 새로운 한용운전집간행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그리하여 작업팀은 다솔사에 내려가 그 실무 작업을 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그해 겨울 경에는 거의 원고가 작성되었다. 그러나 통문관의 주인인 이겸로와 전집간행의 구도 계약까지 완료하였으나 성사는 안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만해의 유고를 보관하였던 효당의 불교계 내부의 일과 가사 등의 문제가 중첩되어 전집 간행은 더 많은 시일을 요하게 되었다. 마침내 1970년 초부터 세 번째의 간행위원회가 결성되고 재작업이 시작되었다. 당시 그 작업에 관여한 인물은 최범술, 민동선, 김관호, 문후근, 박노준, 인권환 등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신구문화사와 계약을 맺어 1973년 6월 전 6권의 전집을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이처럼 만해 전집이 간행될 수 있었던 저변에는 효당의 만해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솔사가 만해정신의 구현처가 되었음에는 효당과 만해와의 인연이 자리잡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다솔사는 만해를 연구하는 학자, 만해를 그리워하는 수많은 이들의 탐방처가 되었다. 그러나 작금의 다솔사가 아직도 만해의 체취가 살아 있는지 자못 궁금하다. 더욱 만해가 심었다는 그 향나무와 우국충정을 논하던 금잔디 밭은 푸르른 자태를 뽐내고 있는지 말이다.

출처 : 김광식
건국대 대학원 사학과 졸. 문학박사. 현재 대각사상연구원 연구부장. 저서로는 『한국근대불교사연구』, 『한국근대불교의 현실인식』, 『근현대불교의 재조명, 용성, 우리가 살아온 한국불교100년』 등이 있음.